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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와함께

봄은 측은하다

by 나무에게 2013. 12. 24.

올 봄에는 왕벚나무와 회화나무, 황금회화나무를 옮겨 심는 일을 했다. 사람 키를 넘어 2미터에서 3미터 높이의 나무들이다. 밭에 심고 나서 적당한 시기에 옮겨 심지 않아 자기들끼리 좁다고 아우성이다. 출가를 시켜야 하는데, 여력이 부족했었나 보다. 그러나 더 이상 미룰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 자리를 비워주어야 또 다른 묘목들이 그 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 나무 기르는 데에는 순환의 미덕이 이루어져야 한다. 항상 여유 면적을 확보하고 있어야 한다. 그러니 적당한 크기에 도달하여 규격에 도달한 나무는 판매 되어야 하고, 그 자리를 차지할 고운 인연의 나무가 옮겨 앉아야 한다. 그렇게 한쪽의 숨통을 터 주어야 켜켜 크기의 나무들이 각각의 아우성에서 벗어나 행복한 미소를 띠며 기꺼이 옮겨 심겨지는 것이다. 마땅한 면적의 공간이 꼭 필요한 것이다. 엉키고 성겨 있고 몸이 가늘어져 있는 나무를 그냥 두고 볼 수만은 없다. 더군다나 흙을 붙여 캘 수 있는 여유 공간이 없었다. 그래서 그냥 맨뿌리 굴취를 하여 옮기기로 결정한다. 가까운 거리이고 이른 봄이라면 맨뿌리로 캐서 얼른 심는 것도 활착이 잘된다.

왕벚나무와 회화나무를 캐고 있는데, 회화나무 10주를 얻고자 하는 사람이 있었다. 접을 붙인 황금회화나무도 부탁을 한다. 주로 제3자에게 뭔가를 얻어서 그것을 또 다른 이에게 생색내며 보내주는 형국이다. 회화나무는 학명이 Sophora japonica 이며 콩과식물이다. 학명의 Sophora에서, 영명인 Chinese Scholar Tree에서 중국 사람들이 부르는 학자수學者樹에 이 나무가 학문적인 어떤 분위기와 맥을 함께 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중국이 자생지로 매우 귀한 대접을 받으며 주로 선비들이 서당이나 서원에 즐겨 심었다. 우리나라에서도 궁궐이나 오래된 고가에서 이 나무의 고목을 많이 볼 수 있다. 그런데 나무를 얻고자 하는 이 분은 회화나무를 사찰에서 많이 심었다며 아는 사찰에 나무를 보내고자 하는 것이다. 조계종의 본산인 조계사에도 400년 된 수령의 회화나무가 있다. 보통 회화나무를 유교의 상징으로 보리수나무를 불교의 상징으로 말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사찰에도 학승과 선승이 있고 기술승이 있었으니 회화나무 역시 학승의 분위기와 잘 맞아 떨어진다. 다만 요즘의 사찰에는 기술승이 없는 게 못내 아쉽다. 모두 학승이고 모두 선승이다.

올해처럼 봄이 벚꽃 잔치에 들쑥거린 해도 드물 것이다. 온통 세상이 벚꽃 축제다. 왕벚나무에게는 봄을 휘날리게 하는 재주가 있다. 왕벚나무의 원산지는 제주도로 1908년에 이미 학계에 보고되었다. 왕벚나무는 꽃이 필 때 화려하다. 산벚나무는 왕벚나무보다 조금 늦다. 잎이 나올 때 같이 꽃이 핀다. 왕벚나무는 이른 봄에 진분홍색의 봉오리를 맺을 때부터 화사하고 우아한 연분홍색 꽃으로 진행하는 내내 나무 전체를 뒤덮는 꽃의 잔치로 사람을 매료시킨다. 그러다가 바람에 날리며 하얗게 떨어지는 꽃비 쯤에서 사람을 쓰러지게 한다. 봄이 왔다고 산수유, 생강나무, 개나리, 진달래가 우물쭈물 쭈뼛대며 나올 때만 해도 봄기운에 취하지 않을 수 있었다. 나무를 심는 내내 봄꽃과 눈도 못 맞추고, 손길도 못 주고, 함께 놀아 주지도 못했다. 나무 심는 일에 매달려 곁눈질 한번 못하고 지냈다. 그러했음에도 벚꽃 휘날릴 때가 되니 기어코 봄이 너무 측은했다. 돌아보니 봄은 성큼 저만치 떨어져서 나를 바라보고 있다.

캘리그라피(손멋글씨) 일반과정 12주 짜리를 매주 토요일 4시간씩 다니고 있다. 붓과의 해후를 꽤 오래도록 간구하였는지 모른다. 쓰기 위한 도구로 만년필을 많이 가지고 있었지만, 한편으로 붓에 대한 콤플렉스가 늘 있었다. 전철로 한강을 넘는 어느 토요일 오후 여의도 벚꽃 축제에 세상 사람들이 강변으로 전철로 멀리 보이는 국회의사당 주변은 온통 벛나무가 활짝 피어 커다란 원형띠를 두르고 있었다. 좋은 날, 좋은 풍경, 좋은 사람들이 모이는 것을 보면서 나는 4시간의 손글씨 연습을 해야 하는 게 한편으로는 축축한 창고 같았다.. 내가 측은했는지, 꽃피는 봄이 측은했는지 모른다. 봄만 오면 봄을 느끼고 싶은데, 직업상 나무를 심고 고치고 만들다보면 부족한 몸이 쳐지게 되고, 어느 정도 안정되고 일이 마쳐졌다 싶으면 이미 봄은 저만큼 멀리 떨어져 나가 있다. 매년 봄이 두렵고 측은하다. 그 봄을 봄으로 느끼거나 누리기에 힘이 부친다. 내가 하는 일이 살아 있는 나무로 푸르름을 만드는 일에 놓여 있다. 이 일은 항상 시간과 속도를 지닌다.

시간과 속도를 지니는 일에는 무엇보다도 순발력과 유연성을 요구한다. 나무 묘목이 뿌리 채 밭에 놓여 있는데, 당장 그 나무가 목말라 애타서 바짝 말라가는 데, 그대로 두고는, 더우니 마니, 허리가 아프니 땅이 파지지 않는다니 하면서 나무와 사람이 서로 다른 정신 세계에서 머물고 있을 수 없는 노릇이다. 사람의 측은지심이 가득 밭에 머물러 나무의 측은지심과 섞여야 한다. 나무 심는 사람이 사람의 마음으로 나무를 대하면 안된다. 나무의 마음으로 나무를 모신다면 그렇게 뿌리를 하늘로 향하여 바짝 타게 하지 않을 것이다. 잠시라도  묘목을 어머니의 품인 흙 속에 묻어 두고, 내가 심을 수 있는 시간과 속도에 맞추어 하나씩 정성스럽게 심으며 진행하여야 한다. 뿌리를 다듬으면서도 뿌리털이 마를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정성과 속도를 궁리한다. 양동이에 물을 담아 이동하면서 뿌리를 적시며 손질하여 밭에 심는다. 뿌리를 다듬어야 거기서 새 살이 돋아 더 많은 잔뿌리가 만들어진다. 그럴 때 나무는 강건한 몸체를 이룬다.

(2009년 4월 15일, 용주사 월간 사보 [화산] 5월호 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