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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와함께

소나무숲의 향내를 찾는 여행

by 나무에게 2013. 12. 24.

 

 

소나무숲의 향내를 찾는 여행 / 온형근

 

숲의 향기, 그 중 가장 강렬한 향기는 아마 소나무일 것이다. 송진향내라 일컫는 매우 특징적인. 소나무숲이 아니더라도 나무들은 각각 뭔가 독특한 개성을 지닌 냄새가 있다. 어떤 장소를 오랜 세월 지난 후에 다시 찾아 희미해진 옛 냄새를 맡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그곳에서 보내던 때의 일을 떠올릴 수 있다. 아주 강력한 추억 여행으로 안내 해 줄 것이다. 가끔 소나무숲을 걷다 보면 그런 생각이 앞선다. 언제였지? 이곳을 걸었던 적이 분명 있었는데. 무엇이었지. 왜 걸었을까. 어떤 일이 있었을까.

어린 시절 제천 의림지 소나무숲을 기억한다. 내가 지닌 소나무숲 향기의 원천이다. 소수서원의 소나무숲도 꽤 오래 남는다. 좋은 소나무숲은 점점 찾는 사람이 많아지고 있다. 걷는 사람이 많아지니 답압에 의한 피해에 시달린다. 그래도 소나무숲은 여전히 아름답기 그지없다. 쳐다볼 수만 있어도 가슴이 확 트이고 큰 숨을 내쉬고 들이마실 수 있다. 설악산 오색 근처의 소나무숲도 떠오른다. 벽곡 수련을 하면서 소나무의 기운을 마시고 먹으며 몸의 운행을 관찰하고 기를 얻었다. 온몸을 싸고도는 기운이 숲의 진한 향내와 함께 모공을 꿈틀거리게 한다.

살면서 소나무숲 향기 하나쯤 설운 가슴에 묻고 가는 것도 꽤 아름다운 일이다. 초등학교 때의 소풍은 주로 걸어서 가게 되는데, 그 소풍의 대부분이 의림지였다. 의림지를 향한 소풍길은 지금의 차가 다니는 그 길이 아니다. 논이 사방 펼쳐진 한 가운데 넓은 농로길을 통한다. 풀을 묶어 놓으면 아이들은 발이 걸려 넘어지고 긴 행렬이 그 길에 가득 재잘거리며 진행되는 소풍길. 어디쯤에서 진한 솔내가 풍기기 시작한다. 그때쯤이면 어린 마음에도 소풍의 목표지점에 다가선 것을 알게 된다. 그때 의림지는 곳곳에 솔숲이 산재해 있었다. 학년별로 따로 지점을 정해 소풍 행사를 하여도 부족함이 없었다.

숲에서 노는 경험도 소풍 때였다. 보물찾기의 대부분이 근처 산에서 이루어졌다. 오감을 모두 긴장시켜 숲에서 보물의 이름이 적혀진 쪽지를 찾는 일이 아마 숲과 제대로 교감을 이루었던 시초였을 것이다. 소나무숲이 아니더라도 숲은 계절마다 뚜렷한 개성으로 위안과 보이지 않는 기운을 나눠준다. 봄에는 새로 자란 초목과 눈 녹은 물이 풍기는 냄새로 봄기운에 절어 마음이 저절로 설레인다. 한여름에는 지의류며 잡초, 부식토가 뒤섞여 내는 곰팡이 냄새와 습한 냄새로 온 몸의 숨구멍이 함께 들떠 궁시럭 대며 들락날락하는 그 느낌이 소중하다. 한꺼번에 몰려 나와 어디론가 잠시 빠져들고 싶은 유혹을 축축한 밤하늘과 함께 경험한다.

숲의 가을은 또 어떤가. 가을 숲은 마른 풀과 낙엽의 향내가 있다. 마냥 사람이 그리워지고  여백이 철철 넘치는 계절이다. 숲과 나무가 만들어내는 향연으로 숙연해지기까지 한다. 가을 맑은 날 계속되고 밤 온도 뚝 떨어지면서 비 내리지 않는 날이 지속되면, 숲은 세계 어느 곳에 내놓아도 손색없는 아름다운 단풍으로 가득해진다. 바쁜 걸음 멈추는 삶의 여백을 만난다. 여백이라는 것은 순간의 선택이다. 백치미가 있어야 여백이다. 아무 생각이 가감되지 않는 것이다. 단풍으로 탄성 지르다 어느새 겨울 숲을 만난다. 겨울이야 말할 것 없이 침묵으로 이어지는 자연의 휴식이다. 하지만 휴식이라는 것의 진정한 의미는 새로운 생명의 생성을 위한 물밑운동이라는 것도 안다. 자연은 늘 무질서인 척 하면서 위대한 질서로 움직이고 있다.

인간은 자연에 손을 대면서 자연을 개선시킨다고 믿고 있다. 자연은 무질서하니까 질서를 고쳐 잡아준다고 생각하는 무모함을 저지른다. 숲마다 개성을 지니고 있음을 모르면서 다 똑같은 숲으로 치환한다. 자연의 움직임을 제대로 읽지 못한 채 허둥지둥 자연과 관련된 전문직에 종사하고 있다. 자연을 눈여겨 관찰할 여유는 늘 뒷전이면서. 거북등 같이 묵직하게 갈라진 소나무 줄기의 깊은 세월 너머로 솔잎은 여전히 푸르고 단아하다. 내게 안겨 준 소나무숲 향기의 원천인 제천 의림지의 소나무숲을 찾는다. 어디를 다녀오겠다는 말도 없이 언제 떠나고 돌아오겠노라 정하지 않은 채, 내 오래된 향내의 근원지를 찾는 여행. 이번에는 카메라의 메모리를 지우고 잔뜩 소나무숲의 향내를 담아올 참이다.

(2009. 1. 19 계간 다시올문학 2009년 봄호 송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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