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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와함께

우주와 어울려 사는 방식

by 나무에게 2013. 12. 23.

우주와 어울려 사는 방식 / 온형근


우주와 어울려 살 수 있는 방식이 있다면 그 방식을 따르려 한다. 가령 숲을 보더라도 단순림이라 하여 한가지 수종으로 빽빽하게 이루어진 숲은 어딘가 부조리한 느낌을 준다. 잘 정돈되었다는 것이 생리적으로 친근감이 들지 않는다. 하지만, 이 친근감이라는 게 자칫하면 개인적 취향일 수 있기에 함부로 말하기 곤란하다. 여주에 살 때, 학교림에 가득 잣나무가 심어져 있었다. 20년 가까이 가꾸어진 나무이고, 그 숲의 강한 잣나무 향이 아직도 나의 뇌에 심겨져 있다. 이곳에서 몇 년간 숲을 가꾸었다. 그 방식은 잣나무 이외의 나무들을 잡목이라 칭하고 베어내거나 없애는 것이었다. 그러나 해마다 육림의 날 산에 올라가면 다시 잡목이라(?) 할 수 있는 나무들이 생겨나 있는 것이다. 세상에 잡목은 없다. 쓸모없는 나무라는 것은 존재할 수 없다. 심지어 죽은 나무에도 백 년 가까이 숲 속 생명이 깃들어 산다. 살아 천 년, 죽어 천 년이라는 말을 했는데, 그 말은 숲 속 생명의 일상을 정확하게 그려 낸 말이다. 그렇다면, 분명히 이 나무들이 이 숲에서 어떤 필요에 의해 발생한 것임이 틀림없는데도 불구하고 자꾸 베어낸 것이다. 이것이 산림목재생산적 측면에서 본 산림경제학의 근간이기도 하였다. 육림이라는 이름으로 숲을 가꾸는 방식이었던 것이다. 이제 생태적 산림을 운위하고 있기 때문에 이런 경영은 격에 어울리지 않는 방식으로 여긴다.

잘 가꾸어진 단순림보다는 교목과 관목, 활엽수와 침엽수, 낙엽수와 상록수가 어울려 있는 산림의 모습이 가장 이상적이다. 이론과 달리 실제로 이를 적용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던 것 같다. 무질서하게 보이는 자연에서 더 큰 건강함을 찾을 수 있다. 영혼이 건강한 사람들은 대개 자신을 어떤 카테고리에 묶어놓지 않는다. 어찌 보면 산만해 보일 정도이다. 숲의 바닥을 이루는 하층림의 모습을 아낄 수 있어야 한다. 하층림이 제대로 구성되어 있을 때, 오케스트라 같은 하모니가 숲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하층림이 건강할 때 교목인 키 큰 나무도 더욱 건강하게 유지되는 것이다. 혼자 이룰 수 있는 경지도 많지만, 어울려 사는 방식을 천연으로 지닌 나무로서는 이런 어울림이 깨졌을 때 오히려 건강함을 잃게 되는 것이다. 키 큰 나무인 교목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으면 햇빛이 땅으로 스며들 틈이 없게 된다. 결국, 햇빛이 부족한 땅에는 아주 소량의 햇빛만으로도 살 수 있는 식물이 자란다. 그늘에서도 잘 자라는 관목류나 지피식물이 군락으로 덮이고, 어려서는 음수이나 커서는 양수가 되는 어린나무들이 자리한다. 그뿐만 아니라 하늘층을 채우고 있던 교목의 틈새로 올라간 나무들이 다시 하늘을 덮고 차지하면서 기존의 교목을 고사시키고 제 세상을 만든다. 조선의 지천이었던 소나무가 참나무 류에게 밀려 산꼭대기로 도망가는 게 그것이다.

숲에 키 작은 관목이나 풀들이 있을 때, 숲의 습도가 유지된다. 이 관목이나 풀이 자라는 하층 군락이 우주의 온갖 비밀을 간직하는 것이다. 가끔 사람의 발길이 많아진 교목의 숲에 들어가면 바닥은 건조하고 반들거리며 사람의 흔적만 남아 있다. 숲길을 걸을 때 만들어지는 사람의 답압은 숲으로 하여금 물을 머금지 못하게 한다. 물을 머금지 못한 숲은 생명을 잃게 한다. 이런 곳에서 느끼는 것은 답답함과 숨 막힘 같은 질식할 것 같은 건조한 감정이다. 사람에게도 물은 곧 생기와 통한다. 숲의 바닥이라 할 수 있는 하층 군락이 그래서 풍요로운 느낌을 주는 것이다. 이 키 작은 숲에는 벌레나 작은 동물들의 환상적인 속삭임이 있다. 너무나 환상적이고 내밀스러워 바라보기조차 벅차다. 숲에 키 큰 교목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이다. 숲을 바라볼 때 우리는 나무의 끝이 이루어내는 수관선을 혹은 스카이라인을 보게 되는 데, 그 속을 들여다 볼 수 있는 바라봄을 배워야 할 것이다. 사람들은 늘 높은 곳을 오르려 하고 멀리 보려고 애쓴다. 낮은 곳을 허리 숙여 내려볼 수 있고 가까운 곳의 세세함을 보려는 정성스러움이 있어야 한다. 사람이 사는 방식과 우주와 어울리는 방식이 같을 수 없다고 잘라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가끔 사람을 떠나 우주가 살아내는 방식을 눈여겨 살펴볼 필요가 있다. 높은 곳과 먼 곳도 중요하지만, 그 숲 아래에서 초원 또는 지피 군락을 이루며 어깨를 마주하고 살아내는 평범한 사람들의 고단함도 알아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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