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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와함께

호젓한 산길의 유혹

by 나무에게 2013. 12. 23.

호젓한 산길의 유혹 / 온형근

 

나의 행동은 나를 닮은 자연으로부터 읽혀진다. 자연에는 형식과 내용이 서로 다르게 기능하는 질서가 있다. 가령 내가 산길에서 오래되어 푸담한 부엽토의 흙살을 보며 마음이 풍요로워 진다면 자연의 형식과 내용이 만들어 내는 어떤 질서 속에 아름다움을 발견하였기 때문이다. 너무 보기 좋아 속으로 비명을 질러 댈 것이다. 좋은 것은 저절로 입가에 미소를 부르며 흥얼거리게 하는 힘을 지녔다. 나무의 종자를 얻기 위해 산을 찾은 적이 있다. 아마 나무의 종자보다는 새의 노래를 먼저 만났을 것이다. 새의 노래를 듣고서야 그 나무에 열매가 가득 달려 있음을 알게 되는 여정이었다. 때로는 나침반과 배낭만으로 산에 들어 이 나무 저 나무 기웃거리기도 했다. 그러다가 찾고자 하는 나무를 만나면 그 자리에서 오래도록 그 나무를 바라보고 있다. 바라보기만 해도 좋다. 그런 날 산을 내려올 때 느꼈던 엄청난 기운은 내 것이 아니라 자연의 온갖 환희에 의한 신비로움인 것을 알게 된다. 

아니 어쩌면 호젓한 산길을 걸으며 엄습했던 것은 괜한 우울이었는지도 모른다. 호젓하다는 것 자체의 맛을 즐기다 더욱 큰 우울의 성을 쌓았는지도 모른다. 갑자기 살아있음의 생채기라도 하지 않으면 안될 짙은 그늘도 산길을 함께 하기 때문이다. 내가 얻은 나무의 종자는 사실 새의 먹이로 자연으로 돌아가야 할 중요한 식량일 수 있다. 새가 즐겨 먹는 종자를 생산하는 많은 식물들을 식이식물이라고 한다. 정원에 혹은 거실에 새장을 두고 새소리를 듣기 위해 새를 기르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그보다 한 차원 높은 것은 새의 먹이가 되는 식이식물을 선정하여 정원에 심는 일이다. 철마다 고르게 찾아 심는다면 새소리는 더욱 생동감 있고 청량해 진다.

자연은 스스로 생성하고 소멸한다. 그 생성과 소멸의 길을 열어주는 것이 생명과 존재에 대한 따뜻한 배려가 될 것이다. 새가 스스로 찾아와 지저귀고 생동감이라는 뜨거운 감흥을 안겨주게 하는 정말 좋은 방법은 자연의 질서 속에서 발견할 수 있다. 호젓한 산길을 걸을 때 가질 수 있는 우울도 자연의 질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데서 비롯된다. 대체 어느 정도 그 질서에서 벗어나 살고 있는가를 생각하면 아직도 한참 멀기만 하다. 살면서 자신을 돌아보고 반성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지려 한다면 숲을 찾아들 일이다. 혼자 찾아드는 숲일수록 생생한 외경심을 만날 수 있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젓한 산길은 여전히 우울하다. 자연스럽게 자리하여 제 목소리를, 제 얼굴을 드러내는 것을 사람들은 야생상태라는 수식어를 달고 표현한다. 사람들은 알게 모르게 학교 교육을 통하여 사회화 되고 있다. 그러한 사회화 과정에서 혼란스럽다고 생각되는 모든 것들을 좋게 표현할 때 야생이라는 접두어를 사용한다. 사람에게 ‘야생적’ 혹은 ‘원시적’이라는 수식어를 붙여 호칭하는 경우가 있다. 이는 교육에 의한(?) 제도적 틀에서 얼마만큼 이탈하였는가의 정도를 두고 하는 말이다. 호젓한 산길에서 제 멋대로 자신을 표현하는 방치된 듯한 풀과 나무들에서도 야생이라는 수식어가 필연처럼 따라 붙는다. 

숲을 자주 찾다보면 이러한 제도화된 틀에서 스스르 힘이 빠지며 새로운 시각으로 대상을 바라볼 수 있는 자연의 눈이 하나 더 생기는 것을 느끼게 된다. 제 3의 시각이 그것이다. 누구나 제가 지닌 그릇만큼의 사고와 행동으로 세계를 경험한다. 낯설고 서툰 어떤 환경에 처했을 때도 사람들은 낯설고 서툰 모든 것에서 벗어나고자 결국 자신이 지닌 그릇 속의 내용을 풀어놓고 종합하여 어떤 해결점에 도달하게 된다. 때로는 이렇게 만들어진 해결 방법에 흐뭇해하기도 하지만 숙성의 시간과 효소가 필요하기에 자신의 자양분으로 쌓지 못하고 잠깐 사이에 잃게 되는 경우도 생긴다. 

날아가는 새에게 아무리 다정한 눈길을 주어도 새는 돌아보지 않는다. 호젓한 산길에서 만나게 되는 우울도 마찬가지다. 내가 자연의 질서를 지니려 애쓰지 않으면 어느새 우울은 환한 숲 밖으로 튀어나와 감쪽같이 사라지고 만다. 환하다는 것 속에 우울은 존재할 수 없다. 다시 숲을 찾아 혼자됨의 경험이 있어야 우울의 존재를 만나게 된다. 자연 속에 붙잡아 맬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매달려 있는 것 또한 있을 수 없다. 그 속의 오래된 우울을 경험할 수 있을 때 자연은 새로운 기운을 전달해준다. 자연이 사람의 심성과 다른 점은 올곧게 자신의 본질을 쉽사리 풀어헤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도시의 빌딩이나 관청을 찾아가면 단정하고 깨끗하게 조경을 해 놓은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단정하고 깨끗해야만 하는 공간에도 이제는 야생의 느낌을 부여하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도시는 도시다워야 한다고들 한다. 그 도시다워야 하는 가치 기준의 근거를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를 곰곰 생각해 본다. 간편하고 유용한 공간이어야 하기 때문이 아닐까. 가을 은행나무의 단풍을 흔들어 떨어뜨려 청소를 하기 편하게 하는 행위와 다를 게 없다는 생각이다. 노란 은행잎을 감상하고 밟아보고 싶은 사람도 있다는 사실을 사치라고 일침을 가하기에는 이를 좋아하는 사람이 꽤나 많기 때문이다. 

사색은 야생의 숲처럼 호젓함의 잿빛 속에서 이루어지는 게 아닐까? 동서남북 사방을 향해 산이 뻗어 있듯이 숲의 우울은 들뜨고 화려한 세상을 향해 무언의 항거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허위와 포장이 뚜렷하게 행세하는 틈 벌어진 사회를 위하여 깊은 우울을 요구하는 것일지 모른다. 내가 새벽마다 호젓한 산길을 걷는 것은 조금이라도 겸허함이 새어나지 않기 위함이다. 나무 종자는 떨어져 다시 나무가 되어 열매를 맺고 있다. 새는 끊임없이 순환하는 자연의 질서 속에서 정말 맛있는 만찬을 즐길 수 있다. 순환되는 것이다. 숲의 우울은 들떠 있는 세상을 향해 신비한 치료제가 되고 있다. 

나들이 계절마다 사람들은 습관처럼 자연으로 들어가 자연을 채운다. 살아있는 모든 것들을 보고 느끼며 하나의 체험을 공유하면서 좋은 생각과 기운을 얻는다. 무엇이 가치 있는 것인지 혼란한 시대에 살고 있음에도 숲으로 떠난다. 숲은 무엇인가. 걷자. 호젓한 산길의 우울을 마시자. 그리고 숙연해보자. 숲의 우울은 흔적있는 삶을 확인해 준다. 내가 걸을 수 있는 힘이 있고 산길이 거기에 있기에 밟히는 사각거림 하나에도 삶의 확인은 가능하다. 나를 에워싸고 보호해주는 울타리가 있음을 호젓한 산길은 알려 준다. 그 속에서 꺼억꺼억 울 수도 있다는 것을, 그 벅찬 환희의 재잘거림이 우울과 함께 버무려 있다는 것을. 

(월간 용주사보 ‘화산’ 2009년 6월호 원고 송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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