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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月白藝術

허암 정희량, 혼돈주가

by 나무에게 2013. 12. 24.

혼돈주가(渾沌酒歌)


정희량(鄭希良)

귀양살이 이래로 술을 집에서 빚어 마시는데, 거르지도 않고 짜지도 않고 그대로 마셔 이름을 ‘혼돈주’라 하니, 이것은 옛 법을 숭상함이다. 취하면 문득 “어어” 하며 하는 노래에,

내 막걸리 내 마시고 / 我飮我濁
내 천성을 내 보전하네 / 我全我天
내가 스승 삼는 술은 / 我迺師酒
성인도 아니, 현인도 아니 / 非聖非賢

대개 그 즐거움을 즐기는 자는 마음에 즐김이니, 늙음이 오려는 것도 알지 못한다. 사람이 누가 나의 이 술을 즐기는 뜻을 알 것인가. 고요(皐陶)ㆍ직설(稷契)이 요순(堯舜)을 도움이나, 안자(顔子)ㆍ증자(曾子)가 공자를 스승으로 모심이나, 포정(庖丁)의 소, 혜강(嵇康)의 풀무, 재인(梓人)이 경상(慶賞) 때문에 종구라기를 만들지 않음이나, 난쟁이가 만물로써 매미를 바꾸지 않은 전심치지(專心致知)의 즐거움이 나와 마찬가지이기로, 시를 지어 그 뜻을 보인다.

긴 밧줄로 가는 해를 잡아매려 하고 / 長繩欲縶白日飛
큰 돌로 하늘을 기우려 하여 / 大石擬補靑天空
허튼 생각, 오산으로 허공에 빠져 / 狂圖謬算坐濩落
반 세상에 문득 늙은이가 되었네 / 半世倏忽成老翁
두어라, 혼돈주나 흠뻑 마시고 / 豈如飮我渾沌酒
담소중에 당우 시절을 대하여 보자 / 坐對唐虞談笑中
혼돈의 도를 내 처음 시작함은 / 渾沌有道人未試
이 법이 부구공(선인(仙人))에서 권하여 왔네 / 此法遠自浮丘公
백이도 아니, 유하혜도 아니 / 不夷不惠全其天
성인도 아니, 현인도 아니 / 非聖非賢將無同
누룩 군을 불러다가 독에 가두니 / 招呼麯君囚甕底
밤낮으로 숨소리가 꼬록꼬록 하더니 / 日夜噫氣聲蓬蓬
이윽고 봄강에 비가 와 흐뭇하듯이 / 俄頃春流帶雨渾
빚어진 색깔이 맑고도 무르익었네 / 醞釀古色淸而濃
바가지에 따라서 부구에게 인사하고 / 酌以巨瓢揖浮丘
가슴속 만고의 불평을 씻어 버리네 / 澆下萬古崔巍胷
한 번 마시니 신령과 통하여 / 一飮通神靈
우주가 개벽하는 듯, 아직 몽롱하고 / 宇宙欲闢猶蒙矓
두 번 마시니 자연과 합하여 / 再飮合自然
혼돈을 도주하여 초자연으로 / 陶鑄渾沌超鴻濛
손으로 혼돈 세상을 어루만지고 / 手撫渾沌世
귀로 혼돈 바람을 들으니 / 耳聽渾沌風
넓고 큰 취향에 내가 주인 / 醉鄕廣大我廼主
이 벼슬은 천작이라 인작 아닐세 / 此爵天爵非人封
구구한 두건을 무엇에 쓰리 / 何用區區頭上巾
도연명도 역시 다사스러운 사람이었네 / 淵明亦是支離人


 

[주D-001]성인(聖人)도 …… 아니 : “술꾼이 청주(淸酒)를 성인(聖人)이라 하고, 탁주(濁酒)를 현인(賢人)이라 한다.” 하였다. 《鮮于輔의 말》
[주D-002]백이(伯夷)도 …… 아니 : “백이(伯夷)는 성(聖)의 청자(淸者)요, 유하혜(柳下惠)는 성의 화자(和者)”라는 말이 있다. 《孟子 滕文公》
[주D-003]두건(頭巾) : 도연명(陶淵明)이 칡 두건으로 술을 걸러 마셨다[漉酒用葛巾]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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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암 정희량은 연산군의 무오사화 때 의주로 귀양간 후, 갑자사화 때 화를 입지 않았다. 미리 도망간 덕분이다. 그는 음양학(역학)에도 능하여 갑자년이 다가오자 머슴에게 "나물을 캐어 저녁 반찬이나 준비해라." 하고는 종적이 없었다. 그후 중종 반정에도 몸을 나타내지 않았다. 신선이 되었다는 소문이 무성했다고 한다. 그가 시와 술과 즐거움을 하나로 여기는 도인의 풍모로 쓴 글이고 시이다. 어떤가. 즐김에 있어서 인작이 어디 있겠는가. 오로지 천작이 있을 뿐이다. 천작이란 저절로 되는 일이다. 저절로 되는 일이란 움직임이 있어야 함이다. 가만히 앉아서 저절로 되는 일을 찾을 수 없음이다. 그러니 술을 빚는 부지런함도 있어야 하고, 솔바람물소리를 듣고자 움직여야 함이다. 전심치지가 있을 뿐이다. 한가지의 온전한 마음으로 이르는 것이다. 그것이 삶이고 앎이다. 밤낮으로 숨소리가 꼬록꼬록 하더니 위산 과다에 속쓰림이 지독하다. 이또한 천작이라 입에 풀칠하는 것을 경계함으로써 다스려지기를 스스로에게 간청한다.

2008. 01. 31. 온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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