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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休林山房

015. 분주하나 제 각각의 존중이 서려 있고 - 화산 용주사

by 나무에게 2014. 3. 31.



015. 분주하나 제 각각의 존중이 서려 있고 - 화산 용주사 / 온형근



화산두견은 수원8경의 하나다. 

화산은 이곳 사람들에게 꽃뫼라고도 불린다. 화산에 두견화가 피는 풍경과 두견새가 우는 정경이 화산두견에 중의적으로 배치된다. 자주 들렸던 곳이고, 사보인 용주사에 나무이야기를 연재하기도 했다. 사찰직관으로 찾게될 줄은 몰랐다. 많은 것들이 모여서 여기까지 찾게 되었겠지만 뜻을 달리 하면 보이는 것도 다르다. 여느 사찰에서 볼 수 없는 홍살문과 삼문이 그래서 낯설게 다가선다. 사도세자를 모시는 사찰로 시작되었음을 알게된다. 산줄기가 겹겹이 모여 꽃모양을 이룬다는 화산에 융릉이 자리한다. 신라시대 '갈양사'로 불리던 사찰을 정조가 아버지를 모시기 위한 원찰로 삼은 것이다. 홍살문과 삼문을 지나면 5층석탑과 천보루가 사찰 공간임을 새겨준다. 들어갈 때의 천보루가 안쪽에서 되돌아보면 홍제루 현판으로 바뀐다. 천보루 계단을 오르면 대웅보전 양쪽으로 범종각과 법고각이 있고 천불전, 호성전, 지장전이 공간을 나누고 있다. 좋은 봄날 많은 탐방객들로 대웅보전이 번잡하다 여겨 지장전에 머물렀다.


분주하나 제 각각의 존중이 서려 있는

대웅보전에 이른다. 과연 정조의 의중이 넘친다. 중앙, 좌,우측 방향 모두 열려 있다. 법당에 절하는 이들 역시 삼방을 향한다. 나는 중앙을 향한다. 자세한 원력을 세우지 않고 절을 한 후, 정좌에 들었다. 부산한 움직임도 시간이 지나니 평화롭다. 낯선 곳으로 나를 인도하는 기운에 이끌린다. 내가 세운 원력이 아닌데도 나를 낯선 곳으로 인도한다. 순간 버티는데 어머니의 미소띤 얼굴이 함께 한다. 어디서든 밭은 새로 일굴 수 있다고 하신다. 당신은 평생 그렇게 사셨다고 한다. 새로운 것과 변화에 버팅기기 보다 함께 어울려 삶을 만들어 가는 게 중요하다는 요지다. 원력을 세운 것도 아닌데 삶을 존중하라는 말을 새기게 된다. 한참을 머물다 나와도 쉽게 법당 근처에 머물며 떠나지 못한다. 대웅보전 전각을 4군데서 받쳐주는 기둥 초석에 잠시 앉아서 쉰다. 아는 사람도 만난다. 가족이 모두 봄날을 만끽하러 나섰나 보다. 한참 이런저런 상념에 갇혀 있는데 풍뎅이 한 마리 오른손 만년필 쥔 손등에 낙지한다. 탄생일지 사몰일지 내도 그도 똑같이 아쓱하다.


놀란 김에 법당으로 다가가 후불탱화를 본다.

한참을 바라보니 그림이 입체로 다가선다. 김홍도가 연경에서 천주교 성당의 성화를 보았고, 이에 영감을 얻어 서양화법을 도입했다 한다. 대가大家는 한번 쓰윽 보면 그 용법이 저절로 풀어진다. 중국과 일본에는 각 분야마다 대가가 있다. 우리는 언제부턴지 대가가 사라졌다. 그러다 요즘에는 티비에서 유행시킨 생활의 달인이 즐비하다. 왜 분야의 대가가 사라졌을까. 서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서로 깎아내리고 흠집을 낸다. 상처와 과오와 허물과 결점으로 상흔이 가득하다. 영광의 상처 위에 대가로 인정받기보다 흠집없이 살아가는 게 더 편안할 것이다. 대가는 별이고 최고봉이고 일인자며 거장이고 달인이다. 명인이고 노장이며 명장이다. 그야말로 갑제甲第다. 대가의 후불탱화 위 천장으로는 용이 몇 마리 보인다. 닫집이다. 불전 안에 또 하나의 불전이 존재한다. 부처의 신성한 공간이 천장 닫집에 또 하나 의도되어 있다. 용주사는 조선의 르네상스 그야말로 갑제의 시대에 정조, 사도세자, 혜경궁 홍씨, 다산 정약용, 단원 김홍도, 번암 채제공 등의 18세기 조선의 꿈같은 시절에 탄생한 효심의 집성체이다. 어머니가 대웅보전에 쓰윽 나타나심이 내게 효심 부족함을 슬쩍 지청구하신 게다. 타박 받을 노릇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