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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休林山房

017. 가슴 속에 불만 가득했던 그 곳 - 설봉산 영월암

by 나무에게 2014. 4. 20.



017. 가슴 속에 불만 가득했던 그 곳 - 설봉산 영월암 / 온형근



기어코 점심 공양칸으로 들어선다.

몇 번을 망설였다. 내 첫 발령지가 이천이기 때문이다. 어딘가 나를 반겨줄 것 같은 이끌림, 내려가고 싶었다. 한때 영월암 아래 계곡은 최고의 도피처였다. 선배와 가끔 이곳을 들려 가슴 속 불만을 토로했다. 세상이 답답하다고 아주 옹색하고 고지식하다고 산속으로 들어왔다. 잘 먹지도 못하는 닭도리탕 같은 것을 시키고는 앉아 따분한 시절을 건넸다. 그 계곡의 장사치 건물들은 모두 사라졌다. 그 자리 조금 아래에 설봉서원이 복원되어 있다. 공양칸에는 먼저 온 일행이 스님도 없이 공양을 시작한다. 스님은 대웅전에서 법회를 마친 후, 다시 삼성각으로 오른다. 삼성각에는 신심 깊은 아낙들로 안팎이 그득하다. 고조된 스님의 음성이 삼성각의 기운을 대신한다. 무릎도 허리도 손도 아랑곳 없이 절하고 빌고 읊조리고 무아경이다. 삼성각 저 아래 대웅전 마당에서 올려 보는 내가 삼매에 든다. 꿈도 함께 꾸고 세상도 더불어 나누던 그 때의 선후배, 지금은 모두 각자의 세상에 갇혀있다.


의외로 공양주가 여럿이다. 인심이 넉넉하다. 

공양에 배려와 염려가 함께 서려있다. 늘 더 먹고 싶지만 처음 담아 온 선에서 마무리한다. 영월암은 이천 설봉저수지, 지금은 도자기 엑스포장이 더 어울릴까. 둘러보고 걸어서 오르는 게 마땅하다. 영월암의 고적함은 으뜸이다. 급한 경사로 물굽이처럼 회돌면서 사찰 근처에 이르면 잘 쌓은  성벽처럼 돌로 기초를 한 위에 심검당이 보인다. 처음 보는 것이다. 내가 다니던 영월암과는 많이 달라졌음을 초입에서 알린다. 그랬다. 생각을 바꾸어 옛 생각을 지우고 처음 온 사찰로 받아들인다. 그래야 어색하지 않을 것이다. 보이지 않는 옛 기억이 아무리 현묘하고 심오하달지언정 달라져 뚜렷하게 새겨지는 금방의 풍정을 외면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영월암은 기세가 있다. 심검당은 선방이다. 선방스님들이 기거하는 영월암은 예전의 고요하고 뒷방 같은 분위기에서 보다 선명하고 명약관화한 사조가 알맞게 엿보인다.


대웅전에서 절을 하고 앉아 깊은 호흡을 하고 싶었는데, 무방한 듯 일어났다. 설봉산의 좋은 기운이 영월암으로 모인다. 그 중에서도 마래여래입상이 모든 기운을 독차지한다. 올라올 때 보았던 기세 좋은 삼형제바위도 절경을 내려다보고 있지만, 마래여래입상 역시 굽어보는 절경으로 늘 구름 위처럼 기분 좋고 흐뭇하다. 설봉산의 좋은 기운을 들이고, 탁한 기운을 내보내는 마애여래입상의 넓적한 코를 한참 우러른다. 받들어 모시고 싶은 코다. 저렇게 넓적한 코로 살 수 있다면 내 안의 기운과 살아온 자취까지 그대로 업적이 될 터이다. 내 옆의 사내는 마래여래를 등지고 산 아래 향해 깊은 명상에 들었다. 아마 소주천을 돌리는 듯 하다. 내가 하고 싶은 걸 그가 하니, 나는 시들해진다. 마래여래를 향해 눈을 아래로 깔고 오래도록 설봉의 기운을 받는다. 소주천을 돌리는 동안 따사로운 바람이 그대로 기운이 되어 온몸을 녹녹하게 이끈다. 설봉산 영월암에서 이천에서의 거친 삶을 보들보들하게 씻어낸다. 또 다른 이천을 내 안에 심는다. 얼마나 아득하고 멀고 까마득한 그리움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