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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와함께

063-이재무, 깊은 눈

by 나무에게 2013. 12. 23.

깊은 눈 / 이재무



마을 회관 한 구석 고물상 기다리며
한 마리 늙고 지친 짐승처럼 쭈그려 앉은,
흙에서 멀어진 적막과 폐허를 본다
젊어 한 때 쟁기가 되어 수만 평의 논 갈아엎을 때마다
무논 젖은 흙들은 찰랑찰랑 얼마나
진저리치며 환희에 들떠 바르르 떨어댔던가
흙에 생 담궈야 더욱 빛나던 몸 아니었던가
논일 끝나면 밭일, 밭일 끝나면
읍내 장터에, 잔치집에, 떡방앗간에, 예식장에, 초상집에,
공판장에, 면사무소에, 군청에, 시위 현장에
부르는 곳이면 가서 제 할 도리 다해온 그였다
눈 많이 내렸던 그해 겨울밤은 만취한 주인 실고 오다가
멀쩡한 다리 치받고 개울에 빠져 저 세상으로 먼저 보내고
저 또한 팔 다리 빠지고 어깨와 허리 크게 상하기도 했던
돌아보면 파란만장한 노동의, 그 오랜 시간을
에누리 없이 오체투지로 살아온 그가 오늘은
바람이 저를 다녀갈 때마다
저렇듯 무력하게 검붉은 살비듬이나 쏟아내고 있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몸의 기관들 거듭 갈아 끼우며
겨우 오늘에까지 연명해온 목숨 아닌가
올 봄 마지막으로 그가 갈아 만든 논에
실하게 뿌리내린 벼이삭들 달디단 가을 볕
쪽쪽 빨아마시며 불어오는 바람 출렁, 그네 타는데
때 늦게 찾아온 불안한 안식에 좌불안석인 그를
하늘의 깊은 눈이 내려다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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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동안은 멈추지 않는다. 내 몸은 기계다. 기계는 돌려야 산다. 멈춘 것은 죽은 것이다. 고요와 정적은 사유에서나 요긴하다. 그러니 몸을 움직이면서 토해내는 사유를 몸사유라고 하자. 그렇다면 몸사유는 살아있는 사유다. 제주를 다녀왔다. 서귀포를 중심으로 중산간지방에 눈길이 멈추어 있었다. 늙은 몸들이 여기 저기 꿈틀대는 곳이었다. 살아 있어서 잠시도 몸을 놀리지 않는 곳이 이곳이다. '무력하게 검붉은 살비듬이나 쏟아내고 있는' 동안에도 '연명'되는 것이 있다면 꿈지럭대야 하는 것들이다. [고라니 고속도로] 시집이 나왔다. 5권의 시집이 나오는 동안 끄집어 낼 게 없다고 했다. 이제는 신화나 몸에서 나오지 않고는 쓸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꿈을 꾼다. '하늘의 깊은 눈'과 만날 수 있기를 고대한다. 내 안을 비출 수 있는 그런 깊은 눈 말이다.
(2007.1.31 온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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