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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와함께

경계하고 또 경계할 일

by 나무에게 2015. 2. 17.



봄학기 준비와 설 전후는 괜히 처진다. 학과 밴드를 보다가 징그러웠다. 다들 제 잘난 사람들인데, 그렇게 무료할 수 없다. 벼슬처럼, 출세처럼 허황되고 징그러운 삶을 축하해주는 연대로 도배다. 하기사 면면을 살펴보면 그저 그럴 것이라 여겨짐에도 어떤 이에게는 매우 자랑스럽고 대단한 일이다. 만약 그 삶이 지탄 받으면서 이루어진 것이라면 거기에도 우리는 손을 들어 줄 것인가. 청문회에 가장 열 받아 하면서 자신은 그와 같은 혹은 더한 길을 추구하며 근접하지 않았음을 한탄하고 있을까. 굵직한 벼슬에는 청문회가 있지만, 자잘한 구멍가게 조직에는 청문회가 없으니 망정이다. 


노자는 인위적인 모든 발상 자체가 근본을 어긋나게 하는 것이라 했다. 승진이나 직위라는 것은 위로 오르는 일이다. 바닥의 면적에 의존하여 꼭지점을 이루는 위태로운 자리다. 그러니 자신을 지탱하고 있는 뿌리에 대하여 겸손하고 예법에 맞아야 한다. 군림한다든가 요즘 말로 '갑질'은 곤란하다. 조직 문화가 와해되는 첩경이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했다. 자리에 앉으면 절로 멋진 사람이 된다는 말이 아니다. '사람'다운 '사람'이 되라는 말이다. '사람'다운 '사람'이란 무엇인가. 많은 사람들의 생각을 추스리고 훈훈하게 해주어야 한다는 말이다. 쉽게 말해 자신의 도드라짐을 버려야 한다는 말과 같다.


관리자는 욕심쟁이가 되라는 말과 다르다. 일에 대하여 청빈하라는 말이다. 관리자가 하고 싶은 일을 추구하는 게 아니라 조직의 구성원이 원하는 하고 싶은 일을 도와주고 장려하라는 말이다. 이런 자리에 오기까지의 경과 또한 무시할 수 없다. 그러니 큰 벼슬에는 청문회를 하는 게 아닌가. 남의 이목에 노출된다는 게 그래서 어려운 것이다. 아주 일찍 큰 꿈을 가졌다는 이번 총리 역시 주변 정리는 커녕, 큰 꿈을 위해 바지런히 싸매고 묶고 엮어서 의혹으로 달려왔다. 등 돌리는 민심의 자리가 늘어난다. 겪어 보기 전에 실망이 크다. 이 조합은 무엇일까. 곳곳에 인연따라 물결 흐르듯 각각의 삶이 형성되겠지만 스스로 되돌아보고 자신을 경계하는 습관은 일상에서 멀어진 것인가. 거리낌과 깐깐함은 없는 것인가.


살아가는 일일진대 영전이니 승진이니 조잡한 말을 입에 달고 살아야 삶인가. 여기에 편승하는 것이 이 시대를 사는 그럴싸한 방식인가. 그냥 살면 왜 안되는 것인가. 권력과 돈이 그리고 입에 매달고 사는 저 벼슬아치 같은 착각들은 어디에서 연유한 것인가. 그들의 뒤는 어떤가. 야합과 부정한 거래를 지근거리에서 가까운 이들에게 보고 또 보았다. 정당하고 적합한 사람에게 가야 할 공로와 몫을 어떤 방식으로 배팅을 하며 지켜왔는지를. 그들의 가로챔이란 실로 '사람'의 모습이 아니라 징그러운 축생의 몰지각에서 가능한 것이다. 꿈은 꾸지 않는 게 좋다. 성공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야합으로 얻지 못할 것이 없는 세상이다. 그러나 그 야합이 세상을  썩는 냄새로 진동시킨다. 야합이 안되면 그 다음은 사기로 발전하는 용감성을 발휘하더라. 두루 고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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