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바랜 친절
온형근
잠깐 꽃을 피웠을 때도 주변이 환하지는 않았다.
아팠다가 괜찮았다가 끊임없이 나를 봐 달라는
수습 어려운 왼쪽 허벅지를 파고드는 협착처럼
여러 날을 너와 나는 옹기종기 사는 수밖에 없었지
알거나 헤아리지 못하는 사이 송화가루 분칠하고
여름의 가뭄과 다습이 교차할 때 벌레는 구멍을 뚫고
보잘 것 없는 외면으로 먼 발치였어도 괜찮다 했다.
언덕을 치고 오르는 신선한 바람은 알았겠다.
어디서 보랏빛 생경스러운 이치를 따왔는지
내려가는 길에서 안보이던 게 친절하게 삐죽 내민다.
한 무리 뭉쳐 자라거나 떨어져 있거나,
누리장나무의 열매가 입을 봉하였다 터졌을 때,
저 천의무봉의 표정과 깨끗한 도발이
가히 내 마음에 모셔질 궁극의 도법이 아니겠는가
작가 한마디
원림을 노니는 일은 묵힌 내 마음을 들추는 일이다. 누리장나무가 꽃 피운 이후 흐릿한 오염과 훼손으로 저만치 물러나더니 냅다 환하다. 그 환함이 최근 줄곧 지녀왔던 빛바랜 친절이라는 화두를 강화한다. 친절이 계속되면 빛을 상실한다. 어쩌다 만난 친절에 감읍하다보니 오래 지속하는 묵은 친절은 대수롭지 않다. 어둠 속에서 빛나는 누리장나무 열매로 숨을 채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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