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림, 그 뒤편에 선 나무들의 음성 / 변종태시인
<해설>
1. 여기 한 시인이 있다. 그는 홈페이지 <온형근의 시와자연>( http://www.namuwa.org )을 꾸려놓고 있다. 하지만 이곳에는 단순히 시인의 홈페이지라고 하기에는 뭔가 색다른 것들이 있다. 온갖 조경과 식물에 대한 지식과 정보들, 그리고 한 귀퉁이에 링크된 시의 공간. 이 가상의 집 엿보기를 통해 그가 농업계 학교에서 조경과 분재를 가르치는 교사로서 시를 쓰고 있다는, 어쩌면 간략한 정보와 먗 번의 통화로 가느란 인연의 자락만을 쥐고 있을 뿐이다.
시집의 해설을 쓰기에 앞서 이번 사집이 '나무'를 소재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망설였다. 그러면서도 지극히 초보수준이긴 하지만 내가 분재를 취미로 하고 있다는 공통 분모가 있었기에 우선 반가운 느낌이 들었다. 그러다가 막막해지고 말았다. 소위 요즈음 잘 나간다는 시인들의 시ㅡ현란한 기교와 지적인 어사(語辭)들이 문명적이고 세련된 느낌으로, 더구나 외국의 시 이론으로 무장된ㅡ들만 대하다가 가장 자연에 가까운 온형근 시인의 원고는 읽을수록 '콜라'에 길들여진 현대인들에게 '수정과'나 잘 익은 '식혜'의 맛을 줄 수 있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아니, 차라리 우전(雨前) 녹차를 마시는 느낌이라고 해야 더 정확할 것 같다. 잘 익은 물을 적당한 온도로 식힌 후, 바싹 마른 우전 녹차를 한 스푼 띄우고 뚜껑을 덮어 지리할 만큼의 시간을 기다린 후 뚜껑을 열었을 때, 오감(五感)에 전해지는 초록의 느낌.
물론 온형근 시인의 시들 중에 더러 외국의 시 이론들로 설명해야 명확해질 시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번 시집의 포맷은 '나무'와 '자연'이다. 최근들어 생태시니 환경시니 하는 말들을 하지만, 이런 잣대를 들이대면 '온형근 시인이야말로 생태주의자다'라는 결론을 쉽사리 이끌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면 분명한 논리로 그의 시에 대해 재단(栽斷)할 수 있을 것 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잣대를 들이대고 싶은 생각은 없다. 아니, 그보다 온형근 시인이 시는 어찌보면 비생태의 시라고 할 수도 있다. '생태시'나 '환경시'라고 하는 것들은 그 자체가 '자연의 파과'라는 의미가 전제되어 있다. 하지만 온형근 시인의 시에서는 그런 문명에 의한 '파괴'를 경험하기 이전의 상태를 노래한다. 다라서 이 시집에 실린 시들의 대다수는 차라리 그것들과는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조금 흐름에서 벗어나는 감이 있지만, 분재(盆栽)라는 예술이 있다. 그런데 분재를 자연에 대한 '왜곡'과 '파괴'라는 논리로 압박한다면, 그에 대해서는 할 말이 있다. 우선 모든 예술이 '자연에 인공을 가미하는 것'이라는 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멀쩡한 바위나 나무를 캐다가 쪼고 다듬어서 조각작품을 만들고, 자연의 분방한 소리에 인위적인 오선을 그리고 줄을 세워 음악을 만들고, 멀쩡한 색깔끼리 섞고 버무려서 그림을 그린다. 또한 일상적인 언어에 조직적인 폭력을 가해서 시라고 하는 예술을 만들어 낸다. 분재의 경우도 그 매재(妹材)가 살아 있는 나무라는 것을 제외하면 여타의 예술과 다른 것이 아니다.
흔히 자연보다 아름다운 것이 없다고들 한다. 하지만, 어떤 화가가 무지개의 영롱한 색과 질감을 그려내겠는가. 어떤 음악가가 사랑의 노래를 부르는 꾀꼬리의 노래보다 나은 소리를 만들어 내겠는가. 이야기가 곁다리로 흘렀다. 하지만 온형근 시인의 시를 이해하는 데 분재(盆栽)에 대한 사전 지식 몇 가지는 필수불가결한 이야기다. 그의 시는 분재를 포함한 살아 있는 모든 것들에 대한 측은지심(惻隱之心)에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2.
어쩌면 자연의 시간은 가잔 잔인한 집행자다. 나무의 꽃이 피지 않아도 때를 기다려주지 않고, 오늘 못한 숙제가 있다고 해도 사람을 기다려주지 않는다. 이렇듯 나무를 아끼고 가꾸는 사람에게 시간은 새로운 의미로 다가온다. 그것은 '기다림'이다. 기다림의 의미를 아는 사람은 삶의 의미를 안다. 기다림도 간절하고도 절망적인 그림움을 안고 있을 때, 그 기다림은 차라리 행복한 절망에 가깝다. 온형근 시인의 시에서도 시간의 잔인함과 그에 맞서는 시인의 기다림을 읽을 수 있다. 다음의 시가 이런 면을 잘 보여주는 예이다.
분에 심은 담쟁이덩굴이 붉은 피를 뚝뚝 뿜는다
돌담에 이어 자란다 하여 낙석(洛石)이라 했는데
기댈 곳 없어 더욱 붉은 정열 기염을 토해내고
곧 지려나 보다. 벗겨진 줄기에서 기근이 말라
사랑이 되어 흡착될 담장이 없는 분재였기에
엊저녁 그를 닮은 가을 붉은 노을이었다
담쟁이덩굴의 유혹으로 노을이 불타고 있었는지
담쟁이덩굴이 짙은 노을을 닮아 가고 있었는지
땅거미 가득 분재대로 깔릴 때면 어슬렁
작은 몸집의 고양이 세 마리가 분주해진다
해가 질 때
담쟁이덩굴이 붉은 피를 뚝뚝 흘릴 때
세상이 낮에서 밤으로 바뀌려 할 때
하나의 생각에서 또 하나의 생각이 눈을 뜰 때
담쟁이덩굴 붉은 노을 될라 거듭 견주는듯
내 안의 붉은 정열 또한 술 익듯 깊어진다
ㅡ『담쟁이덩굴, 붉은피 』전문
붉은 노을이 질 무렵, 시인은 분재가 진연된 분재대앞에 서 있다. 마침 가을이고, 붉게 물든 담쟁이 분재는 선연한 핏물인 듯 '붉은 피를 뚝뚝'흘린다. 그 조용한 풍경 속에 고양이 새끼 세 마리가 저녁거리를 찾는다. 시간은 면도날처럼 낮에서 밤으로 넘어가는 중간을 베고 있다. 그 시간의 단면(斷面)에서도 붉은 핏물이 진다. 이 때쯤이면 생각도 이성에서 감성으로 접어드는 시간, 문득 뜨겁게 일렁이는 지난 세월의 정열이 온몸에 솟구친다.
이 시를 통해 다만 좁은 화분 안에서 제한적이고 통제받는 삶을 영위하면서도 정열을 잃지 않는 담쟁이 분재에서, 자신의 인생을 읽어내는 시인을 만나게 된다. 그것은 다시 우리 인간들의 모습이다. 화분에 심어진 분재, 그것은 바로 제한된 영역 안에서 자신들의 삶을 영위해야 하는 인간들의 모습이다. 그러면서도 누군가로부터 물과 영양을 공급받고, 비로소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낼 수 있는 시간이 왔을 때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드러낼 수 있는 인간과 인간다움을 가르치는 삶의 참모습일 것이다.
이번 시집에서 '나무'라는 단어는 무척 의미심장하게 사용되었다. 동양사상에서 '나무'는 흙에서 솟아오른 '불'의 상징으로 표현한다. 유치한 계산이지만, 74편의 시를 묶어 시집을 내는데, '나무'라는 단어가 95회나 사용되었다는 것은, 시인이 그만큼 비중을 두고 있다는 것을 입증할 것이다. 이는 물론 시인의 전공이나 직업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꽃'이라는 단어도 52회나 사용되었다. 이는 이번 시집에 반영된 시인의 식물학적 상상력을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 될 것이다.
꽃이 피어
아 꽃이 피었구나 했다
그 사이에
있고 없음
묻고 답함이 스쳐갔다
그 꽃이
살짝 입힌 노란색 꽈리로
새 옷 입은 것을 보고서야
꽃은 지는게 아닌 것을
꽃이 하나인 것을
내 눈길이
젖어 있었다
ㅡ『모감주나무』 전문
이 시는 존재에 대한 시인의 인식을 담고 있다. 개화(開花)의 전과 후(전후가 아니다), 그 틈에서 실존과 부재에 대한 물음을 제기한다. 그러고는 꽃이 지고 난 뒤의 결실과 감동을 담아내고 있다. 물론 자연현상 그 자체만을 염두에 둔 시라면 시의 맛이 떨어져 읽을 맛이 안 난다. 더구나 '꽃은 지는 게 아니'다 라는 시인의 선언은, 삶과 죽음, 존재와 부재 사이의 빈 자리를 효과적으로 메꿔조고 있다고 할 것이다.
온형근 시인의 붉은 색에 대한 의미도 남다르다. 시집의 곳곳에서 발견되는 붉은 색의 이미지는 시인의 강렬한 생명 의식을 엿보게 한다.
입하(立夏) 근처 비가 옵니다
당신이 잠든 사이 피기 시작한
명자나무 빨간 꽃잎이 떨어지기 시작했어요
선붉은 정열이 당신을 닮아
잣나무 사이로 빛 바랜 당신의 외투가 보이고
담배불을 붙혀 당신 근처에 꽂아봅니다
마냥 허허롭게 웃으시는 당신
뿌연 담배 연기 속에 피어 오릅니다
입하(立夏) 근처에 머물러 봅니다
날궂이를 한번도 그냥 넘기시지 않았지요
아마 오늘도 어깨를 곧추 세우며
여름이 시작되었다며 반가워하시겠지요
입추(立秋)까지는 아직 멀기만 한데요
당신의 날궂이는 여전히 제게 남아
비오는 날이면 어김없이 더운 입김이 어려 있지요
ㅡ『아버지』에서 '4_입하' 전문
비교적 장시에 속하는 이 시는 '아버지'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이 묻어나는 시다. '명자나무 빨간 꽃잎', '선붉은 정열'. '담배불'로 이어지는 시상의 전개는 강렬한 생명력으로서의 붉은 이미지를 제시한다. 그것도 오래 전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으로 심은 '명자나무'에서 입하 무렵에 피어난 명자꽃은 더없이 강렬하기만 하다.
시간의 변화는 공간의 변화를 동반한다. 아니, 시간과 공간은 불가분리(不可分離)의 속성을 지닌다. 이러한 시간과 공간의 변화는 대상의 변화만을 초래하는 것이 아니라, 인식 주체의 변화를 동반한다. 그래서 어느 비평가는 '사람이 같은 강물을 두 번 밟을 수는 없다.'고 말했는지도 모른다. 한 발을 딛고 나서 다른 발을 디디려고 하는 사이 강물은 흐르고, 자신의 몸과 마음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온 세상이 초록으로 넘쳐, 초록마저 질리는 여름 날, 선연히 붉은 명자꽃은 시인의 아버지의 정열을 닮아 있다. 더구나 비가 오는 날이면 어김없이 '날궂이'를 했던 아버지, 어쩌면 그 당시에는 그런 아버지를 보면서 힘들고 괴로워했을 시인이, 이제는 '시간'이라는 집행자에게 등을 떠밀려 와 아버지를 그리워하고 있다. 아니, 시인은 그런 아버지를 닮아가고 있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스쳐 지나가는 꽃이었다
숱하게 많은 꽃들 속에
더러 놀라움이기도 했던
개나리가 남다른 나이에 있다
꽃이 부르는 음성도 달라
세월처럼 드러났다
감추어진다
속일 수 없는 것들로
몸이 예전 같지 않다
그리움도 예전 같지 않고
좋아하는 것들도 달라
개나리가 남다른 나이에
봄이 어느 골목으로 스민다
ㅡ『개나리가 남다른 나이』전문
이제 시인은 불혹(不惑)의 나이를 훌쩍 뛰어 넘어 모든 것들이 달라 보이는 시기인 듯하다. 아무런 의미도 주지 않고 그저 '스쳐지나가는 꽃'이었던 '개나리'가 몸도, 그리움도 예전 같지 않을 때, 이제는 '꽃이 부르는 음성도 달라'진다. 시인이 꽃을 보는 눈이 달라졌다는 의미일 것이다. 사람들은 나이가 들면서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진다. 인간과 사물을 바라보는 제 나름의 눈이 생기고, 그것이 세상을 살아내는 규칙이 될 때, 그의 눈앞에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개나리가 피어난다.
이런 개나리를 매개로 한 의식의 변화는 다음의 시에서도 발견된다.
개나리 지천으로 핀 길 위에서
지난밤은 향기도 맡지 못했었건만
되돌아오는 그 길로 세상이 달랐다
부끄러워하지도
자랑스러워하지도 않았다
낯설었던 처음에는 나도 외면하다
길 위에서 잿빛을 도와 천지를 밝게 함이
진달래의 유혹과도
백목련의 화려함과도 달랐다
개나리꽃으로 지난 겨울을 씻어내는 동안
길은 다시 꽃으로 남아
봄 기억은 다시 길 위에서 노랗게 물들고
살아야 할 희망은 길 위로 쏟아졌다
ㅡ『개나리 지천으로 핀 길위에서』전문
'개나리'는 봄이면 어디서나 쉽게 만날 수 있는 꽃이다. 누구나 쉽게 인지하는 나무이다. 이렇게 흔한 나무에게서 시인은 결코 평범하지 않은 묵상을 계속한다. 깨달음은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가까운 곳에 있다고 순간적으로 울림을 만들어 낸다. 간밤에는 향기도 맡을 수 없었던 꽃이 핀 것을 본 시인에게 개나리는 계절의 숨막힘을 안겨주며 전율하게 한다. 진달래와 백목련의 아름다움과는 다른, 춥고 삭막한 겨울을 깨끗이 씻어낼 수 있게 하는 개나리, 그 개나리는 추억의 길을 다시 노랗게 물들인다. 그것이 '살아야 할 희망'인 셈이다.
이 시를 비롯해, 온형근 시인의 시를 읽다보면 선가(禪家)에서는 '견색명심(見色明心) 문성오도(聞聲悟道)'라는 말을 떠올리게 한다. 이른바 모습을 보고 마음을 밝히고, 소리를 듣고 도를 깨친다는 말이다. 여기에서의 모습과 소리란 다름 아닌 자연의 모습과 자연의 소리를 뜻하고 있다. 누구나 자연의 색을 보고, 소리를 듣지만, 누구나 도(道)를 깨닫는 것은 아닌 것처럼, 모든 사람이 개나리를 본다고 온형근 시인처럼 나름의 의미를 발견하는 것은 아니다.
3.
지금 나는 마당에 심어진 매화나무를 바라보고 있다. 이제는 성장(盛裝)을 벗은 알몸, 저 나무에 붉은 홍매가 피고, 짙푸른 녹음이 있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다. 지난 겨울의 끝자락, 새싹이 돋기 전 꽃망을이 맺힌 홍매에서 아직은 세월을 모르는 어린 여중생의 모습을 보았다. 낯선 이의 출현에도 얼굴을 발그레 붉히며 조금씩 농염(濃艶)한 미소를 띄며 벙글어간다. 그러다가 간당거리는 봄바람에 꽃잎을 떨구는 모습을 볼때는 그의 가슴에도 한 잎씩 쌓여 붉은 그리움이 쌓여간다. 지금은 그 모든 것들을 시간이 만든 그림자일 뿐이라며 시치미를 딱 떼고 돌아앉아 가지만 앙상한 홍매에게서 새삼스레 세월이랄지, 시간의 흐름을 느낀다.
이러한 느낌으로 시를 쓰지 않았을까. 시는 동양의 마음이기에 삶의 여백을 요구한다. 빠르게 변화하고 삭막한 현식에서 조금은 동떨어진 자리, 그 곳에서 시가 생겨난다. 이렇듯 시의 자리는 여백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현실에서 조금은 떨어진 자리에서 삶을 관조하고, 비판하고, 그려내고, 이를 바탕으로 보다 나은 미(美)를 탐색하는 일이 시요, 시를 쓰는 작업일 것이다.
자연이라는 대상도 마찬가지다. 각박하고 메마른 삶에서 약간의 여유라도 가지지 못하는 사람은 곁에 아무리 귀한 것이 있어도 느끼지를 못한다. 나무와 꽃을 바라볼 수 있는 여유, 그것이 시를 쓰는 마음일 것이다. 아니 더 나아가 단순한 관찰과 그것을 그려내는 데 그치지 않고, 적극적으로 대상을 읽어낼 줄 아는 것은 온형근 시인의 몫일 것이다. 그러기에 잔인한 집행자인 시간에서 영원히 자유로운 나무의 미한(美學)을 발결하는 것이 나일까.
이제 시인의 정신적 초상화를 그리는 일도 막바지에 다다른 듯하다. 위에서 논의한 몇 편의 시들로 시인의 정신적인 초상 전체를 아우른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다. 나머지는 이 시집을 읽는 독자들의 몫으로 남겨둔다. 남의 시를 말한다는 것은 분명히 오독(誤讀)일 것이다. 어쩌면 시인의 창작 의도와는 전혀 무관한 방향으로 시를 몰고 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럴지라도 온형근 시인의 시집을 읽는 것은 빛바랜 지구의 한 모퉁이에서 잔잔한 숨을 고르며, 세상과 자연을 어우르는 즐거움이었음을 생각한다.
- 저자
- 온형근
- 출판
- 다층
- 출판일
- 2002.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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