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작시::/시의 풍경을 거닐다

임대정, 물의 기억

나무에게 2025. 6. 29.

임대정, 물의 기억

온형근

 

 

 

거닐만하지 않다면 원림이 아니다.

 

누정 하나만으로 걸터앉아 처마 끝 귀골(貴骨)을 재다가

겹처마일지 용마루에 기름기가 번지름한지를

서까래는 머금었던 습을 날려 마른 체형 통통하고

다리를 꼬고 앉아 마루에 우물 정자 문양이 육감적인지

두 팔로 누워 추녀선을 그리다 난간 곁으로 돌아누울지

 

정자 주변에서 내 안의 확 트인 마음을 끄집어낸다.

옛사람 거닐었을 오솔길 묻혀 있어도 빛난다.

위인이고 친구였을 형과 아우의 길로 두런대는 숨소리

사람의 길에서 길마다 숨기척 수시로 들락댄다.

소멸이고 화석인 매화나무도 그 길을 걷고 나도 스친다.

 

한참을 거닐더니 기어코 분별의 깊이를 놓친다.

생각이 멈추었다가 한가한 듯 되돌아 거닌다.

임대정의 두 연못은 도돌이표 연주로 배를 저어 간다.

천천히 밟고 감내하던 걸음은 이윽고 행보가 더딘데

걷다 윗 못인지 아랫 못인지 분간이 둔해지기 십상

경계가 허물어지니 무한이고 무한의 기호는 무진장이다.

 

임대정 앞마당 네모 연못은 반무방당(半畝方塘)*이라

이 또한 자연을 통해 이치를 깨닫는 수양의 공간일 텐데

방지원도 중도에 돌 하나 세워놓고 세심이라 하였으니

새긴 글자 보이지 않는다고  그대 없음을 천명(闡明)하랴

근원을 찾는 여정은 계절풍에 흔들리며 탄식을 자아내고

마음 어깃장 놓는 날이 많아지니 얼른 들부셔내야지

숨길 수 없이 술렁이는 게 어디 물의 기억뿐이랴

 

 

 

*반무방당 半畝方塘 : 주희의 시 「관서유감」에 나오는 구절로 맑고 잔잔한 마음의 상태를 비유한다. 반무방당은 주희가 사물의 이치를 끝까지 탐구(格物)하고 깨닫는 것(致知), 즉 ‘실생활 속에서 치열하게 공부하고 수양하는 장소’의 상징이다.


시작 메모 :


임대정의 고요한 아침, 연못 위에 떠 있는 안개를 만난다. 발걸음 옮길 때마다 오솔길의 낙엽이 바스락댄다. 옛사람의 숨결을 느낀다. 누정 처마 끝에 앉아 귀골을 재며, 그 곡선에 스며든 세월의 무게를 담는다. 연못가에 멈춰 서니 물 위에 비친 내 얼굴이 낯설다. 

두 연못 사이를 오가며 경계가 흐려진다. 윗못인지 아랫못인지 알 필요는 없다. 개의치 않는 마음도 함께 흐른다. 매화나무의 마른 가지가 손끝을 스치며 소멸의 흔적을 속삭인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생명의 기운이 꿈틀댄다. 물소리가 귀를 간질이며 기억의 파문을 일으킨다. 이곳에서 나는 과거와 현재를 동시에 걷는다.

손끝으로 차가운 연못 물을 만지니 가슴이 서늘해진다. 세심이라 새겨진 돌과 마주한다. 장소만으로 글자의 크기가 더 크게 다가온다. 마음에 어깃장이 놓이는 날, 이 풍경이 나를 달래준다. 술렁이는 물의 기억처럼 내 안의 흔들림도 숨길 수 없다. 이곳에서 나는 자연과 함께 숨 쉬며 도돌이표처럼 거닌다.

 

2025.05.07 - [::신작시::/시의 풍경을 거닐다] - 지선원(至善遠) 곡절 회랑

 

지선원(至善遠) 곡절 회랑

지선원(至善遠) 곡절 회랑온형근 지선원 입구 매달린 시선으로 등장인물 계속 바뀌고몇 번 사진 찍어달라는 젊은이들에게 이끌려봉사하듯 낯모르게 주어진 상황을 힐끔댄다.가운데가 비어 둥

ohnsan.tistory.com

2025.04.04 - [::신작시::/시의 풍경을 거닐다] - 환산정 원림에 머문다

 

환산정 원림에 머문다

환산정 원림에 머문다온형근   수만리 무등산 바우정원을 거듭 탄복하다 금방이라도 보일 듯한 환산정이 떠올라백천로 길가 화순 땅에 그림자 멈추고 발길 이른다.길가에 내려서니 오래전

ohnsan.tistory.com

 

'::신작시:: > 시의 풍경을 거닐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지선원(至善遠) 곡절 회랑  (0) 2025.05.07
환산정 원림에 머문다  (0) 2025.04.04
금선대 소나무 정원  (0) 2025.03.05
독락당 계정 원림을 걷다  (0) 2025.01.11
문막 막국수  (0) 2024.12.27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