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화상
온형근
먼지 풀풀 날리는 길
혼자 등을 보이며 걷는다
그가 누구일까를 생각해 보지 않았다
그의 등뒤로 먼지가 포물선을 긋는다
한참 지나면 길보다 뒷모습이 더 커져 있다
어디를 가는 중인지 궁금해하지 않았다
꽤 오랜 시간 동안 길과 뒷모습은
정지화면으로 움직이고
꽤 오랜 시간 동안 길과 뒷모습은
낯익은 동작으로 바뀌어 있다
어디를 바쁘게
무엇 때문에 휘젓고
어찌하여 걷는가
허튼 먼지를 풀풀 날리며
Self-portrait
Ohn Hyung-geun
A dusty road
Walking alone with his back turned
Never thought about who he might be
Dust arcs behind his back
After a while, his back becomes larger than the road
Never wondered where he was going
For quite a long time, the road and his back
Move like a still frame
For quite a long time, the road and his back
Change into familiar movements
In a hurry somewhere
Stirring for some reason
Why is he walking
Scattering useless dust
시작 메모
먼지 날리는 길 위에서 한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그가 누구인지 생각해본 적 없다. 그저 먼지를 일으키며 걸어가는 뒷모습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의 뒷모습은 길보다 더 커져간다. 존재감이 깊어진다.
정적 속 영화의 한 장면처럼 길과 그의 뒷모습이 멈춰있다. 오랜 시간 동안 그 모습은 변함없이 이어진다. 그러다 문득 친숙한 움직임으로 변모한다. 그제서야 나는 깨닫는다. 그 뒷모습이 바로 나였음을.
어딘가를 향해 서두르는 발걸음, 무언가에 흔들리는 마음. 쓸모없는 먼지를 날리며 걸어가는 이유를 묻는다. 자화상은 때로 이렇게 타인의 모습을 빌려 우리에게 다가온다. 먼지 속에 감춰진 자아를 마주하는 순간이다.
On a dusty road, I gaze at the back of a man. I've never thought about who he might be. His figure, walking and stirring up dust, simply captures my attention. As time passes, his back grows larger than the road itself. His presence deepens.
Like a scene from a silent movie, the road and his back remain still. For a long time, that image continues unchanged. Then suddenly, it transforms into a familiar movement. Only then do I realize—it was my own back all along.
Steps hurrying toward somewhere, a heart swayed by something. I ask why I walk, kicking up useless dust. A self-portrait sometimes approaches us by borrowing the appearance of another. It is the moment of confronting the self hidden within the dust.
오랜 시간 동안 길과 뒷모습은 정지화면으로 움직이고 낯익은 동작으로 변해갔다. For a long time, the road and the back turned into a still screen, moving and transforming into familiar motions.
슬픔이라는 이름의 성역(시와사상 현대시인선 4)
-
- 저자
- 온형근
- 출판
- 시와사상
- 출판일
- 2004.03.13
'::시집:: > 슬픔이라는이름의성역'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하상일_자연의 상상력과 생명의식을 통한 성찰 (0) | 2013.12.26 |
---|---|
가을이 익어가는데 (0) | 2013.12.26 |
딱딱한 의자 (0) | 2013.12.26 |
안개의 숲길 (0) | 2013.12.26 |
빗소리 왁자하여 (0) | 2013.12.26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