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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지와 붓털의 깊이 한지와 붓털의 깊이 아침에는 '해 뜨면 달빛도 그림자도 흔적도 없어진다.'라고 썼다. 오늘 글씨는 다른 곳에서 깨달음이 일었다. 처음에 붓털의 길이가 긴 것으로 멋지게 쓰려고 했으나 한지가 연습지 중에서 최고 하질인 것에다 썼더니 먹물이 그대로 흘러 넘쳐 글씨가 뭉그러지고 만다.. 2013. 12. 23.
누에 누에 깨끗하다는 말만 들었다. 처음에 뽕나무인 줄 알고 따다 주었더니 먹지 않는다. 가만히 생각하니 뽕나무과에 속하는 닥나무였다. 다시 뽕나무잎을 따다 먹인다. 그제서야 사각거리는 소리가 난다. 마치 고욤차를 즐겨 마시는 나와 누에가 같다. 나 역시 이제는 다른 차는 버리고 싶.. 2013. 12. 23.
순해진 화홍문 순해진 화홍문 하필 억수로 쏟아지는 빗 속에 놓여 있었다. 성을 따라 걷는데 흙을 튀어 오르게 하는 비는 우산이 미안할 정도였다. 바지끝이 젖어 무겁게 허리띠를 잡아 내리고 있었다. 튀어 오른 흙은 맨발의 구두 틈을 비집고 발바닥에서 돌을 굴리고 있다. 작지만 엄청난 바위로 인식.. 2013. 12. 23.
바닷가 일번지와 산속 일번지가 바닷가 일번지와 산속 일번지가 내게 시란, 바닷가 일번지와 산속 일번지가 소통하는 일이다. 2013. 12. 23.
공명을 찾는다 공명을 찾는다 공명, 그렇다 공명이 사라진 셈이다. 바람이 불면 우우~하며 지나다가 저 끝에서 수수~하며 되돌아 오는 일이 없어졌다. 산에 오르며 7부 능선 부분에서 숨이 차 헐떡일 때, 청아한 새소리가 공명으로 덮어 주듯 아름다운 화답이 꼬여 있다. 뒤틀린 창자가 울릴 때 앵앵거릴.. 2013. 12. 23.
비바람 비바람 비가 오려는 듯 바람이 강하게 흔들린다. 한꺼번에 몰려 오는 바람에 밀려, 잠시 휘청 댄다. 2013. 12. 23.
꽃 사방 꽃이다. 한 차 가득 꽃을 채운 채 달렸다. 2013. 12. 23.
수런거리다 수런거리다 나무를 찾는 사람이 있었다. 나는 나무보다는 씨앗을 심으라고 했다. 나무들이 수런거린다. 물이 꽉 찬 밭의 흙은 촉촉히 젖어 있었다. 어찌 보면 꽤 알맞은 수분을 지녀 피부가 풍요롭다. 그런데 사방 막혀 있는 소통에 의해 뿌리가 불어 있다. 뿌리들이 수런거린다. 나무를 .. 2013. 12. 23.
앞으로 몇 년이나? 앞으로 몇 년이나? 이 길에서, 서 있을 것인가? 더 머무룰 수 있을까? 희망은 있는가? 그 희망은 대체 무얼까. 이 길에서, 앞으로 몇 년을 머물까. 내 스스로 자승자박하고 있는 것일까. 자업자득일까. 이 길에서, 벌써 겨울인가. 2013. 12. 23.
생각들 생각들 섬세한 봄, 꽃망울을 보면서 꿀꺽 혼자 삼키는 감흥, 그건 봄의 느낌이 아니라 중압감. 혼자 놀다가 혼자 걷는 길에서 아직 봄은 멀지만, 당장 내일이라도 봄은 그 길에 지천일 것이라는 생각. 2013. 12. 23.
섬세한 세상 섬세한 세상 인류는 지상낙원을 건설할 능력을 가지고 있다. 방대하게 축적된 지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패하고 있다. 자연을 거역하고 자연법칙을 무시한 계획이 지속되는 한 실패는 계속될 것이다. 현대사회의 오류는 개발규모가 크다는 것이 아니다. 자연을 경시하고, .. 2013. 12. 23.
따뜻한 날 따뜻한 날 4시간 연속 강의를 하고 난 따스함을 말하고자 함이다. 다시 2시간을 기다리고 있지만, 온몸으로 따스한 기운이 샘솟는다. 참 좋은 날이다. 이런 기분 오랜만이고, 살아있음으로 포근하다. 2013. 12. 23.
언어의 무의미성 언어의 무의미성 약은 짓을 하다가, 내게 걸렸다. 한 번은 야단을 쳐야 하겠는데, 한 번 봐주니까 자꾸 약은 짓을 한다. 무지렁이로 여긴다. 그래서 야단을 치긴 치는데, 방법이 서툴렀다. 준비가 되지 않은 채 마주쳤다가 그 자리에서 설익은 소리를 질렀다. 그게 또 인용의 불편함이다. .. 2013. 12. 23.
餞別 餞別 가고 오는 사람들로 북적인다. 1년 뭐 있어! 하면서 위안한다. 2013. 12. 23.
가짜판 가짜판 가짜들이 난무하다. 가짜들에게도 쓸만한 뭔가가 있는 것이겠지. '전화로 미안한데......' 로 시작하는 민망한 이야기들. 말을 꺼내면 안되는 부탁으로 시작되는 공공의 적들. 자기가 해야 할 일이 분명한데, 몇 군데 전화로 쑤셔대며 무방비를 찾아 허한 구석에 들이대는 저돌적 업.. 2013. 12. 23.
비 온 후에도 비 온 후에도 거침없이 쏟아내린 비 온 후에도 풀을 머금은 밭흙은 뜨거운 입김을 지녔다. 얼마나 가물었으면, 저 비조차 다시 데워져 훈기로 되돌아올까. 2013. 12. 23.
골라 읽는다 골라 읽는다 수없이 많은 방황 속에 단 한 개의 방황을 골라 읽는다. 이틀의 술로 침묵만 남아 있다. 술을 마시면서 나는 생각을 들이켰다. 그리고는 허탈하여 비어 있는 바닥을 바라본다. 2013. 12. 23.
허한 겨울강 허한 겨울강 출렁이며 흐르는 풍요로운 강물의 설레임은 이미 사라졌고 강물이 강바닥에 바짝 달라붙어 흐르는 겨울강의 모습이 나를 긴장시킨 것이 분명하다. 이 또한 오래되어 바닥을 차고 치오르는 게 아니라 관성처럼 이끌리어 긴장으로만 타성이 되어 있다. 별다른 느낌이 없다. 무.. 2013. 12. 23.
시간의 소요 시간의 소요 숲을 마시는 데에도 삶의 시간이 소요된다는 것은 참으로 즐거운 발견이다. 숲이 있음으로 해서 숲을 마시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는 것 시간이 숲으로 인해서 늘어져 배열될 수 있다는 것 바쁘고 빠른 세상에 숲은 느리고 시간을 벌어주는 장치이다. 2013. 12. 23.
장안문에서 창룡문 사이 장안문에서 창룡문 사이 불빛이 눈을 찡그리게 하는 것 말고는 오르고 내리는 적당한 관계 설정이 근사하다. 2013. 12. 23.
백운산 정상에서 절벽 아스라이 백운산 정상에서 절벽 아스라이 백운산을 산책하듯 오른다. 바위로 둘러싸인 심한 오르막이 있어 감추었던 절경이 순진하다. 아이까지도 멀리 보이는 풍경을 좋다고 한다. 자신의 내면을 감싸는 것들이 바위며 격랑이면 어쩌랴. 관절을 여미며 통증으로 파고드는 게 있건만 그때마다 돌.. 2013. 12. 23.
막걸리집 하나 얻기가 막걸리집 하나 얻기가 막걸리집 하나 얻기가 참 힘들다. 삼삼하고 불편하지 않고 안면이 트이지 않는 곳을 하나 찾는다. 그런 막걸리집에서 만난 글이다. 아무리 생각하여도 도연명의 동리채국과 관련되어 있다. 그런데 실제로는 채국동리로 시작되는 글이다. 왜 나는 동리채국으로 기억.. 2013. 12. 23.
하이패스 남자 하이패스 남자 / 온형근 빨간 신호봉을 그저 아래 위로 흔들 뿐 눌러 쓴 사각 정모에 가려 먼산을 보는지 한번 열린 동공의 망막에 흐린날이 뿌려져 그 남자, 세상에 나와 사주팔자에 없는 애꿎은 손만 내리고 올라갈 뿐 바람과 비와 햇빛 앞에 고스란히 그 남자 하이패스로 흐르는 불빛에.. 2013. 12. 23.
오후 4시의 커튼을 젖힌다 오후 4시의 커튼을 젖힌다 / 온형근 입에서 단맛이 난다. 일어나 고개를 숙인채 지탱할 수 있는지 서서히 머리를 맞물려 있는지 삐거덕대는지 좌우하상으로 돌려본다. 머리를 숙였을 때 온몸에 지진일 듯 쌍심지 켜놓고 신호를 보낸다. 간신히 뇨의를 어쩌지 못해 깊은 해저에서 부상한다.. 2013. 12. 23.
설악 설악 / 온형근 근골이 정연하다. 높고 낮음의 위계가 있다는 게, 갑자기 기울어 녀려오는 쪽 또는 급한 용무가 도사리고 있다. 갑자기 솟아오른 볼멘 성정이 바위의 크기에 따라 도드라질 수 있겠다. 풍화의 세월을 내내 기다리지만 그 시간이라면 다른 곳도 함께 삭아가기에 여전히 솟아.. 2013. 12. 23.
의존 의존 / 온형근 혼자라는 것은 또 다른 의존에 다름아니다. 그윽하게 가득찬 생활에서 꿈꾸는 게 혼자라는 공간과 시간과 이들을 둘러싼 환경이라면, 혼자의 상황 자체에도 추구하고자는 의존이 있게 마련이다. 관계 속에서 혼자의 의미가 성립된다. 관계가 중요하다. 관계없이 혼자의 개.. 2013. 12. 23.
연필 속으로 잠기는 것이었다 연필 속으로 잠기는 것이었다 / 온형근 연필깎는 의지에게 칼이 주어지지 않았던 그날 닳다가 돌려지는 흑연가루의 안타까운 절규앞 연필 깎는 시간이 유난히 긴 내게 손톱으로 연필 끝을 후비거나 끌처럼 밀어올리거나 칼을 찾다가 까만 점을 속살로 가리고 있는 틈새로 숨통을 열어본.. 2013. 12. 23.
시녁이 괴롭다 시녁이 괴롭다 / 온형근 물만 끼얹다시피 들락거리는 고된 시녁(신역)은 술 마시는 날을 증명한다. 거울앞에 서 있는 면도, 머리 만지는 시간이 늘어나는 것을 보니 언간히도 시녁에 편해졌다. 시녁이라는게 고달픈 쪽으로 쉽게 끌린다. 편안하자는 시대와 달리 시녁은 몸을 괴롭히는 즐.. 2013. 12. 23.
진동 세포 진동 세포 / 온형근 도인체조 2회면 꼬박 두 시간 여를 눈 뜨고 일어나자 마자, 잠자리 들기 직전 이불을 끌어 올려 가슴을 덮고 기대 앉았건만 생각은 자꾸 헤프게 흘러내려 젖꼭지 드러난다 벗은 몸에서 삐그덕 대는 존재의 연약한 확인음 오른 바지주머니쯤에서 뜬금없이 찌리리릭 왼 .. 2013. 12. 23.
과실의 숙기 과실의 숙기 / 온형근 덜 익은 과일을 따서 익혀서 먹는 것이 좋은가요. 완전히 익은 과일을 그 자리에서 먹는 것이 좋은가요. 먹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익혀서 서서히 맛을 음미하며 먹는 것이 좋겠지요. 그러나 과일의 입장에서는 완전히 익을대로 익어 툭 치면 터질 정도가 되어야 제 몸.. 2013. 12.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