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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와함께567

098-함민복, 감촉여행 감촉여행 (시. 함민복) 도시는 딱딱하다 점점 더 딱딱해진다 뜨거워진다 땅 아래서 딱딱한 것을 깨오고 뜨거운 것을 깨와 도시는 살아간다 딱딱한 것들을 부수고 더운 곳에 물을 대며 살아가던 농촌에도 딱딱한 건물들이 들어선다 뭐 좀 말랑말랑한 게 없을까 길이 길을 넘어가는 육교 바.. 2013. 12. 23.
097-황희순, 한여름 밤의 꿈 한여름 밤의 꿈 / 황희순 고추 몇 포기 심은 8층 베란다 화분에 엄지손톱만한 청개구리 한 마리 앉아 있다 창문도 꽁꽁 닫아 놓았는데 이 한밤 어떻게 여기까지 왔을까 인연이 닿으면 생명도 전깃불 켜지듯 홀연히 켜지는 것일까 언젠가 만져본 듯한 보드라운 살 두 손 오므려 받쳐 들고 .. 2013. 12. 23.
096-이규배 , 오늘, 석류나무가 밤새 울었다 오늘, 석류나무가 밤새 울었다 / 이규배 아, 사랑아 마른 입술에 빨리던 담배 꽃불처럼 확확 달아올라, 꽃 피어 오디 빛 피 맺히던 스무 살 적 네 젖무덤에 고개 묻고 울던 젊음이 먹먹한, 먹먹한 뉘우침의 빗방울로 석류나무 붉은 상처 위에 매달리고 매달리다가 아아, 온 밤을, 온 밤을 울.. 2013. 12. 23.
095-박남희, 구름 비빔밥 구름 비빔밥 / 박남희 나는 비빔밥을 즐겨 먹는다 여러 가지 나물을 큰 그릇에 담아 고추장을 넣고 쓱쓱 비벼 먹는 재미와 맛이 그만이다 나물들은 그릇 속에서 고추장에 비벼지면서도 고개를 꼿꼿이 세우며 일어서서 자신들의 싱싱함을 자랑한다 무엇에 한 통속으로 비벼진다는 것 비벼.. 2013. 12. 23.
094-이기와, 깊음과 여유를 아는 중년의 섬진강 깊음과 여유를 아는 중년의 섬진강 / 이기와 섬진강은 순수 미인이다. 상류나 하류 어디를 가도 성형한 흔적은 찾아보기 힘들다. 나이가 들 만치 들어 깊음과 여유의 성숙미가 돋보이는 자태를 갖고 있다. 두메산골 아낙처럼 가꾸지 않았지만 촌스럽거나 무지해 보이지 않다. 정갈하게 일.. 2013. 12. 23.
093-김종미, 눈물 화석 눈물 화석 / 김종미 울음이 타고 흘러내리는 벽에 대한 기억이 있다 사십 세, 나와 동갑이던 윗집 여자가 남편을 잃고 흐느끼는 소리였다 침대머리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있노라면 환한 대낮에도 섬뜩한 울음소리가 흘러내렸다 한 일 년, 내 등을 적시며 벽이 그렇게 울었다 그렇게 울음을 .. 2013. 12. 23.
092-이규리, 예쁘기를 포기하면 예쁘기를 포기하면 / 이규리 TV에서 본 여자 투포환 선수나 역도 선수는 예쁘지 않다 화장기없는 그 얼굴들은 예쁜 것을 뭉쳐서 멀리 던져 기록으로 바꾸었다 미모의 탤런트가 예쁘기를 포기하니 단박 연기에 물이 오르고, 예쁜 데 신경 쓰지 않는 라면집 아줌마가 끓이는 라면은 환상적.. 2013. 12. 23.
091-이면우, 작은 완성을 위한 고백 작은 완성을 위한 고백 / 이면우 술, 담배를 끊고 세상이 확 넓어졌다 그만큼 내가 작아진 게다 다른 세상과 통하는 쪽문을 닫고 눈에 띄게 하루가 길어졌다 이게 바로 고독의 힘일 게다 함께 껄껄대던 날들도 좋았다 그 때는 섞이지 못하면 뒤꼭지가 가려웠다 그러니 애초에 나는 훌륭한 .. 2013. 12. 23.
090-이승하, 저 강이 깊어지면 저 강이 깊어지면 / 이승하 바람 다시 실성해버려 땅으로 내리던 눈 하늘로 치솟는다 엊그제 살얼음 덮였던 강 오늘은 더 얼었을까 얼마만큼 더 두터워졌을까 깊이 모를 저 강의 가슴앓이를 낸들 알 수 있으랴 눈 … 눈 닿는 어디까지나 눈이 흩날려 세상은 자취도 없다 길도 길 아닌 것도.. 2013. 12. 23.
089-도종환, 시래기 시래기 /도종환 저것은 맨 처음 어둔 땅을 뚫고 나온 잎들이다 아직 씨앗인 몸을 푸른 싹으로 바꾼 것도 저들이고 가장 바깥에 서서 흙먼지 폭우를 견디며 몸을 열 배 스무 배로 키운 것도 저들이다 더 깨끗하고 고운 잎을 만들고 지키기 위해 가장 오래 세찬 바람 맞으며 하루하루 낡아간.. 2013. 12. 23.
088-최명란, 멍 멍 / 최명란 베란다에 둔 가을무가 오글오글 노란 싹을 틔우곤 물컹 썩었다 목까지 차올라 멍이 드는 무의 푸른 고통을 견디며 가슴속에 수도 없이 갈겨놓은 푸른 글씨들은 물이 되 었다 퍼렇게 오른 알몸으로 서로 부둥켜안고 참 무던히도 파닥거렸을 거다 아팠던 자리에 꽃이 피고 흔적.. 2013. 12. 23.
087-윤석산-외로움이라는 말의 파문(波紋)을 바라보며 외로움이라는 말의 파문(波紋)을 바라보며 / 윤석산 그대여, 나는 외롭다고 말하려 하네. 내 말이 그냥 그렇게 들린다면 누군가 사랑하고 싶다고 말하려 하네. 그래도 그냥 그렇게 들린다면 누우렇게 풀잎이 시들어가는 언덕 너머로 흐르는 흰구름을 따라 어디론가 떠나고 싶다고 말하려 .. 2013. 12. 23.
086-함순례, 꼴림에 대하여 꼴림에 대하여 / 함순례 개구리 울음소리 와글와글 여름밤을 끌고 간다 한 번 하고 싶어 저리 야단들인데 푸른 기운 쌓이는 들녘에 점점 붉은 등불 켜진다 내가 꼴린다는 말을 할 때마다 사내들은 가시내가 참, 혀를 찬다 꼴림은 떨림이고 싹이 튼다는 것 무언가 하고 싶어진다는 것 빈 하.. 2013. 12. 23.
085-임경빈, 청미래덩굴 청미래덩굴, 나는 어릴 때 이 덩굴을 고향의 뒷산에서 보았다. 아무리 보아도 이상한 것이었다. 우리 동네사람들은 이것을 망개라고 불렀다. 1~2m정도로 뻗어나가는 덩굴식물이지만 둥글고 강인해 보이는 잎이 인상적이었다. 잎의 색깔은 진한 푸름이고 유달리도 번쩍였다. 광택이 있다는.. 2013. 12. 23.
084-김종미, 고등어 좌판 고등어 좌판 / 김종미 구울 거요? 지질 거요? 내려칠 칼을 든 여자와 좌판의 고등어가 두 눈 빤히 뜨고 나를 보고 있다 염라대왕이 이런 기분일까 네 영혼을 지글지글 구워주랴? 아니면 얼큰하게 지져서 이 지옥을 기름지게 할까 그러고 보니 내 몸이 지옥이다 이 지옥 속에 감금된 영혼을 .. 2013. 12. 23.
083-김용택,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 김용택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사는게 이게 아닌데 이러는 동안 어느새 봄이 와서 꽃은 피어나고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그러는 동안 봄이 가며 꽃이 집니다. 그러면서 그러면서 사람들은 살았다지요 그랬다지요 ---------- 김용택 시인은 최근에 정년을 하고 지구온난화 .. 2013. 12. 23.
082-최을원, 자전거, 이 강산 낙화유수 자전거, 이 강산 낙화유수 /최을원 길가 철책 너머, 오래 방치된 자전거를 안다 잡풀들 사이에서 썩어 가는 뼈대들, 접혀진 타이어엔 끊어진 길들의 지문이 찍혀 있고 체인마다 틈입해 화석처럼 굳은 피로들, 한때는 자전거였던 그 자전거 한 사내를 안다 새벽, 비좁고 자주 꺾인 골목을 .. 2013. 12. 23.
081-천양희, 1 년 1 년 / 천양희 작년의 낙엽들 벌써 거름 되었다 내가 나무를 바라보고 있었을 뿐인데 작년의 씨앗들 벌써 꽃 되었다 내가 꽃밭을 바라보고 있었을 뿐인데 후딱, 1년이 지나갔다 돌아서서 나는 고개를 팍, 꺾었다 ------------ '돌아서서 나는 고개를 팍, 꺾었다' 꺾이지 않고 살기에는 뒷목이 .. 2013. 12. 23.
080-윤제림, 세 가지 경기의 미래에 대한 상상 세 가지 경기의 미래에 대한 상상 / 윤제림 올림픽 경기 중에 마라톤만큼 단조로운 경기도 없다. 신문 한 장을 다 읽도록 드라마 한 편이 끝나도록 같은 장면이다. 땀 얼룩의 일그 러진 얼굴과 뜨거운 대지를 두드리는 나이키 운동화 아니면 검은 맨 발.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이 경기.. 2013. 12. 23.
079-온형근, 모감주나무 모감주나무 / 온형근 꽃이 피어 아 꽃이 피었구나 했다 그 사이에 있고 없음 묻고 답함이 스쳐갔다 그 꽃이 살짝 입힌 노란색 꽈리로 새 옷 입은 것을 보고서야 꽃은 지는게 아닌 것을 꽃이 하나인 것을 내 눈길이 젖어 있었다 ------------------------------ 첫 시집에는 유난히 나무가 등장한다. .. 2013. 12. 23.
078-김인자, 일월저수지 일월저수지 / 김인자 술판 끝나고 심야에 찾아간 일월저수지 어디서 왔는지 낮에는 볼 수 없었던 물오리 떼들 와그르르 짝짓기에 수면이 휘청거린다 처음 물오리들은 어떻게 이곳으로 이사오는 길을 알았을까 둑 발치께 엎드려 사는 갈대들은 알 것이다 숨을 죽이고 문구멍으로 몰래 훔.. 2013. 12. 23.
077-안상학, 국화 국화 / 안상학 올해는 국화 순을 지르지 않기로 한다 제 목숨껏 살다가 죽음 앞에 이르러 몇 송이 꽃 달고 서리도 이슬인 양 머금다 가게 지난 가을처럼 꽃 욕심 앞세우지 않기로 한다. 가지 잘린 상처만큼 꽃송이를 더 달고 이슬도 무거워 땅에 머리를 조아리던 제 상처 제 죽음 스스로 조.. 2013. 12. 23.
076-박정대, 되돌릴 수 없는 것들 되돌릴 수 없는 것들 /박정대 나의 쓸쓸함엔 기원이 없다 너의 얼굴을 만지면 손에 하나 가득 가을이 만져지다 부서진다 쉽게 부서지는 사랑을 생이라고 부를 수 없어 나는 사랑보다 먼저 생보다 먼저 쓸쓸해진다 적막한, 적막해서 아득한 시간을 밟고 가는 너의 가녀린 그림자를 본다 네.. 2013. 12. 23.
075-이영광, 숲 숲 / 이영광 나무들은 굳세게 껴안았는데도 사이가 떴다 뿌리가 바위를 움켜 조이듯 가지들이 허공에 불꽃을 튕기기 때문이다 허공이 가지들의 氣合보다 더 단단하기 때문이다 껴안는다는 것은 이런 것이다 무른 것으로 강한 것을 전심전력 파고든다는 뜻이다 그렇지 않다면 나무들의 .. 2013. 12. 23.
074-이면우, 봄밤 봄밤 / 이면우 늦은 밤 아이가 현관 자물통을 거듭 확인한다 가져갈 게 없으니 우리집엔 도둑이 오지 않는다고 말해주자 아이 눈 동그래지며, 엄마가 계시잖아요 한다 그래 그렇구나, 하는 데까지 삼 초쯤 뒤 아이 엄마를 보니 얼굴에 붉은 꽃, 소리없이 지나가는 중이다. ------------ 이슬비.. 2013. 12. 23.
073-김소양, 별 소나기 별 소나기 / 김소양 영월 마대산 산골마을 어둔이골에서 자던 날이었습니다 뒷간까지 내려가는 것도 무서워 마당에 쪼그리고 앉아 소피를 보고 있을 때였지요 하늘 구석구석 촘촘히 뚫어놓은 작은 창, 그 구멍마다 들이대고 있는 눈과 눈에서 은빛 명주실이 소나기로 쏟아지며 저를 휘감.. 2013. 12. 23.
072-정희성, 시인 본색(本色) 시인 본색(本色) / 정희성 누가 듣기 좋은 말을 한답시고 저런 학 같은 시인하고 살면 사는 게 다 시가 아니겠냐고 이 말 듣고 속이 불편해진 마누라가 그 자리에서 내색은 못하고 집에 돌아와 혼자 구시렁거리는데 학 좋아하네 지가 살아봤냐고 학은 무슨 학 닭이다 닭 닭 중에도 오골계(.. 2013. 12. 23.
071-유현서, 감자 캐는 날 감자 캐는 날 / 유현서 고자리 먹기 전에 서둘러라 널찍이 떨어져 호미를 들어라 찍히거나 끊기면 안 된다 이젠 들을 수 없는 소리 들리지 않는 소리들을 들쳐 업은 옥수숫대가 감자밭 저쪽에서 슬며시 내려놓는다 네 살 박이를 떼어놓고 간 어미 혼자 쭈그리고 앉아 연신 감자를 낳는다 .. 2013. 12. 23.
070-서안나, 새의 팔만대장경 새의 팔만대장경 / 서안나 합천 해인사 팔만대장경의 경판은 무르나 단단했다 나무를 바닷물과 뻘밭에 묻어 결을 달랜다고 했다 나무의 습성을 내려놓는 치목(治木)의 시간이라 했다 겨울 천수만의 새들도 부드러우나 단단했다 뻘밭에 고개를 박는 새에게서도 산벚나무 냄새가 났다 주.. 2013. 12. 23.
069-신경림, 파장 파장 / 신경림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 이발소 앞에 서서 참외를 깍고 목로에 앉아 막걸리를 들이켜면 모두들 한결같이 친구 같은 얼굴들 호남의 가뭄 얘기 조합빚 얘기 약장수 기타소리에 발장단을 치다 보면 왜 이렇게 자꾸만 서울이 그리워지나 어디를 들어가 섰다라도 .. 2013. 12. 23.